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가미 요시아키 (문단 편집) == 생애 == 1560년에 성인식으로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이름을 받아 요시아키로 개명하였으며, 3월에 사가에 성을 공격하는 것에 처음으로 출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1563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쇼군 요시테루를 알현했다고 하며, 1564년에 여동생 [[요시히메]]가 [[다테 테루무네]]에게 시집 가서 [[다테 마사무네]]를 낳았으므로 이후 마사무네의 외숙이 되었다. 1570년에 아버지인 요시모리와 다투었다가 5월에 가신인 우지이에 사다나오의 중재로 화해하여 8월에 가독을 상속했다고 하며, 1574년 1월에 요시모리와 사이가 악화되면서 요시모리가 [[다테 테루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텐도 요리사다, 시라토리 나가히사, 쿠라조 요리자네, 노베사와 미츠노부 등이 테루무네에게 동조하는 등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모두 물리치면서 9월 10일에 유리한 상황에서 강화하여 다테 가문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아버지인 요시모리와는 화해하는 한편 1575년에 동생인 나카노 요시토키를 죽였다. 다테 가문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했지만 모가미 가문의 분가의 일원인 텐도 요리사다, 히가시네 요리카게, 카미노야마 미츠카네, 시라토리 나가히사 등은 따르지 않았으며, 1577년 텐도 요리사다를 맹주로 한 모가미 분가로 구성된 모가미 8순과의 전투 도중에 화친을 맺어 요리사다의 딸(텐도고젠)을 측실로 맞아들인다. 1578년에 카미노야마 미츠카네가 테루무네의 지원을 받아 공격하자 카시와기야마 전투를 벌였는데(결국 대패해서 본성인 야마가타 성이 4방으로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요시히메가 가마를 타고 전장으로 난입하여 그 싸움을 중재하면서 화의를 맺었다. 1579년에는 중병에 걸린 것 같아서 유도노 산에서 기원을 행했다고 하며, 1580년에 미츠카네의 부하인 사토미 민부에게 내통하면 카미노야마 령을 주겠다는 약속으로 꾀어내어 민부를 통해 미츠카네를 살해하도록 하면서 카미노야마 성을 점령하였으며, 1581년에 오나바자와에서 우마소로에라는 행사를 통해 그 힘을 과시하였다. 같은 해에 텐고 가문의 인척인 호소카와 나오모토를 마키가하라 전투로 격파하여 오구니 성을 점령하였으며, 여름에는 오노데라 가문의 가신인 사케노베 히데츠나를 공격했다. 1582년에 텐도고젠이 모가미 요시치카를 낳고 죽었기 때문에 분가인 텐도 가문과의 화목이 깨졌으며, 1583년에 다이호우지 요시우지가 모가미 공격을 계획하자 그 가신인 토우젠지 요시나가와 내통하여 요시우지를 급습하면서 요시우지를 자결시킨다. 1584년에 시라토리 나가히사의 딸을 장남인 모가미 요시야스의 정실로 맞아들여 회유를 시도했지만 응하지 않자 병으로 위독하다고 칭해 나가히사를 야마가타 성으로 유인하여 죽이면서 야치 성을 공략하였으며, 이어서 사가에 타카모토를 공격하여 자살시키는 것으로 사가에 가문을 멸망시킨다. 또한 아버지인 요리사다의 뒤를 이은 텐도 요리즈미를 공격하였다가 모가미 팔순의 한 명인 노베사와 미츠노부의 분전으로 패하여 퇴각하자 미츠노부의 적남인 야스미츠에게 차녀인 마츠오히메를 시집보내 야스미츠를 끌어들였다. 히가시네 요리카게의 가신인 사토미 겐우에몬을 내통시켜 히가시네 성을 공략했으며, 이에 궁지에 몰린 요리즈미가 코쿠분 모리시게를 의지하면서 달아나자 데와를 통일했다. 1586년에 오노데라 요시미치와 아리야토우게에서 싸워 승리하였으며, 1587년에는 다이호우지 요시우지의 동생인 다이호우지 요시오키가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 요시오키를 공격하여 자결시켰다. 1588년 2월에 조카인 [[다테 마사무네]]가 오사키 요시타카를 공격하여 오사키 합전을 벌이자[* 오사키 가문은 요시아키의 정실인 오사키 부인의 친정이다.] 원군을 보내어 다테 군을 격파했지만 여동생인 요시히메가 가마를 타고 전장으로 난입하자 다테 군과 화목하게 된다. 8월에 우에스기군 [[혼죠 시게나가]]의 공격으로 쇼나이 지방을 빼앗기는 등(쥬고리가하라 전투) 우에스기 군과의 전투가 계속되는 와중에 이전부터 친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통해 교섭했지만 [[나오에 카네츠구]]가 [[이시다 미츠나리]]를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접근하였기 때문에 쇼나이 지방은 우에스기 령으로 공인되어 쇼나이 지방을 되찾지 못했다. 1590년에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히데요시를 알현하여 영지 24만 석을 받았으며, 아버지인 요시모리의 장례로 늦게 참전했지만 사전에 이에야스와 교섭하여 문책은 없었다고 한다. 같은 해에 오슈 징벌 때 발생한 센보쿠 잇코잇키가 일어나자 오노데라 가문의 영토로 출병하였으며, 1591년에 이에야스가 [[쿠노헤 마사자네]] 토벌을 하려고 할 때 차남인 이에치카를 도쿠가와 가문의 시동으로 출사시켰다. 딸 [[코마히메]]가 매우 아름다워서 이 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 겸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눈에 들어 그의 측실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삼남인 모가미 요시치카에게 히데요시를 섬기게 하였다. 1592년에는 히젠 나고야 성에서 체류했으나 조선에의 도하는 하지 않았고, 동년 야마가타 성의 개축을 시작하였다. 1594년에 오노데라 요시미치의 신하인 야가시와 미치타메에게 가짜 서신을 보내어 요시미치가 미치타메를 참수하게 만들었고 요시미치와의 싸움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1595년에 히데츠구가 모반 혐의로 할복 자살을 하자 딸인 [[코마히메]]는 연좌되어 처형당했다. 원래 여성은 살려두는 것이 관례인데도 이를 무시한 데다가, 아직 정식 측실도 아닌 [[코마히메]]를 살해하고 시체를 가지고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고 묻었다. 거기다가 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아내도 바로 14일 뒤에 딸의 뒤를 따라 사망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마에다 토시이에]],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 28명과 함께 기청문을 제출했으나 히데요시로부터의 의심은 가시지 않았고, 다테 마사무네와 같이 근신 처분을 받았다. 요시아키는 가정을 꽤나 아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히데요시를 마음속 깊이 증오하고 경멸하게 되었고, 일단 본인까지 연좌되는 일을 피하자 정치적 파장을 염려한 히데요시가 벼슬을 주어 달래려고 했음에도 핑계를 대서 얼굴조차 보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도요토미 가문에 깊은 원한을 가진 탓에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즉각적으로 동군에 가담하여 케이쵸 데와 합전에서 이에야스의 지시로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견제했다. 하지만 동군인 난부 토시나오는 잇키 때문에 참전이 늦어졌고 다테 마사무네가 단독으로 우에스기와 화의를 맺자 고립될 위기에 처한 요시아키는 장남인 요시야스를 인질로 보내어 강화를 도모하려고 했으나 아키타 사네스에와 결탁하여 우에스기 군을 공격하려는 계획이 우에스기에 알려져 화의는 성립되지 않았다. 이후 우에스기 군과 오노데라 군이 연합하여 공격하면서(케이쵸 데와 합전) 요시아키는 단독으로 우에스기에 맞서야 하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다테군의 루스 마사카게가 원군으로 왔으나 상황에 적극적인 개입은 하지 않았다. 야마가타 성의 요충지인 하세도 성에서 가신인 시무라 미츠야스가 우에스기 가신 카미이즈미 야스츠나를 죽이는 등 끈질기게 저항하여 하세도 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우에스기군은 요네자와로 퇴각했다. 요시아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에스기 령의 쇼나이 지방, 유리 군, 오노데라 가문의 요코테 성을 공략하여 쥬고리가하라 전투 당시 잃었던 영토들을 회복했다. 이 공로로 이후 57만석을 받아 데와 야마가타 번의 번주가 되었으며, 아키타 사네스에가 동군을 배신했다고 참소하여 [[사타케 요시노부]]와 자리를 바꾸는 식으로 전봉되게 하였다. 에도 막부 성립 이후에는 번 통치에 대해서는 백성에 대해 너그러워서 그가 생존할 당시에는 [[잇키]]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1603년에 장남 요시야스와 사이가 벌어져 요시야스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에 관해서는 차남인 이에치카에게 가독을 잇게 하려는 막부 또는 이를 이용하려는 가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이 있다. * 막부와의 문제보단 가신들과의 문제가 맞다고 한다. 모략, 암살, 외교협상 등등 정략을 피려고 하면 사탕이 필요하다. 사탕주고 다시 빼앗고 죽이는 조카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신들의 세력이 워낙 커졌다. 예를 들어보면 쇼군이었던 이에야스 가신 중 속칭 '도쿠가와 4천왕' 중 1명인 혼다 다다카쓰의 영지가 10만석 이었던데 반해 요시아키측 가신이었던 다테오카 미츠시게의 영지는 4만 5천 석(일본 전토를 주무르는 막부가 개국공신에게 10만석을 준 거고 일본 일부 57만석을 가진 다이묘가 가신에게 4만5천석을 준 것이다)이었다. 세력이 비대해진 가신들과 선대 정도의 영기와 능력이 없는 후대와의 싸움은 일본이 전제왕권이 아니었던 저 시기엔 가신들의 승리다. 저 당시 요시아키는 국정을 이복동생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그에 반발한 장남과 요시아키의 동생(가신 연대가 차남을 바지사장으로 세워 정쟁이 벌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론이다. 아직 저 시기에는 요시아키가 건재하긴 했지만 요시아키부터도 히데요시의 시동 출신인 장남보단 이에야스의 시동인 차남을 후대로 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투쟁을 묵인했던지 아니면 장남을 죽였던지?) 후에 막부 입장에선 당연히 너무 많은 영지를 가진 모가미가를 견제하기 위해서 더 없이 좋은 기회였고 요시아키 사후 다테 가문을 이용해서 바로 개역시켜 버린다. 1611년 3월에 종4위하 사코노에쇼쇼, 데와노카미에 임명되었으며, 1613년에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하고 슨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여 모가미 가문의 후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데와의 여우'라는 이명도 그렇고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일러스트와 능력치를 보면 음험한 책략가의 이미지로만 비춰지는데, 실제로 적의 내부 분열을 이용하는데 능하고, 자신의 즉위에 방해되는 아버지를 유폐하고 동생을 참살하는[* 다테 마사무네도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험악했고 요시아키와 같은 이유로 동생을 죽였다. 이외에 둘다 야전의 무용보다는 모략과 사전 공작에 능했고, 도쿠가와 막부 집권 이후에는 농업에 힘을 기울여 각자의 영지의 석고를 크게 늘리는 업적을 남긴 것도 닮았다. 둘의 사이가 나빴던건 일종의 [[동족혐오]]일지도?][* 다만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았다는 기록도 있고 동생인 나카노 요시토키는 실존인물인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등의 모습도 있지만, 사실 무용이 뛰어난 무사를 흠모하고 아랫사람에게 관대하며 시문을 좋아하는 의외의 일면들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글솜씨(특히 와카)는 대단해서 일본 문단 내에서도 그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중요한 작가 중 한명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나름대로 호걸스러운 면모가 있는 인물임에도 음험하고 간교한 이미지만 남게 된 것은 사이가 나빴던 외조카 다테 마사무네가 워낙 대중적 인기가 많고, 요시아키의 손자 대에 이르러 모가미 가문이 [[야마가타]] 번의 지배권을 상실하면서 덩달아 요시아키까지 폄하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시아키의 손자 요시토시가 3대 번주가 되었지만 일부 가신들은 요시아키의 4남이자 요시토시의 삼촌인 야마노베 요시타다가 번주로 더 적합하다고 믿었다. 요시토시는 아버지인 2대 번주 이에치카를 요시타다가 독살했다고 주장해 큰 소동이 벌어졌지만 막부의 조사 결과 이는 모함으로 밝혀졌다. 막부에서는 도쿠가와 가문과 모가미 가문의 오랜 동맹 관계를 고려하여 요시토시와 가신들을 화해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하는데, 영지 박탈을 위한 핑계였을 수 있다. 요시토시는 [[가이에키|개역]]되어 오미 오모리번 1만석으로 쫓겨났다. 요시토시의 아들 대부터는 5천석의 하타모토로 전락했고, 데와 모가미 가문은 에도 시대에 50만 석이 넘는 대번이 개역당한 몇 안되는 사례로 남게 되었다. 실제로 간계에 능한 것은 맞지만 음험한 인물은 아니었다. 사후가 문제였지만, 살아생전엔 전국시대 그 흔한 골육상잔의 역사도 없었고(요시토키라는 동생 자체가 개역 후 다테 측에서 만들어낸 인물이란 것이 거의 정설이다) 그와 적대하고 있던 세력이라도 한번 굴복시킨후엔 함부로 토사구팽하거나 하지 않았고 후대해주었다. 당장 모가미 8순의 중요한 위치였던 노베사와 미츠노부는 요시아키와 사돈이 되었고(상대방의 딸을 인질로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딸을 인질로 준 것이다. 보통 저 시대에는 승자측이나 유리한 측이 상대방 여자를 인질로 받는데 요시아키는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면서 인질이 아니라 진짜 사돈관계를 맺은 것이다) 다이호우지 가문 같은 경우 낭인이 되어 우에스기 가문에 식객으로 있던 자손을 자신의 영지를 떼어주며 가문을 재건시켜줬다[* 물론 다이호우지 가문 자체가 요시아키의 계략에 의해 무너지긴 했다]. 저런 인품이 널리 퍼져 요시아키 휘하로 들어가려는 세력이 많았다.(오히려 비슷한 과정으로 세력을 확대한 다테는 매번 반란, 배반, 학살의 악순환을 반복했다) 일본에서 대히트한 [[NHK]] 대하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드라마)|독안룡 마사무네]]에서도 음험하고 간교한 모습이 강조되어 나왔지만 지역의 역사적 인물을 너무 폄하한다는 야마가타 현의 항의가 잇따라 극 중반부터 음험하고 간교하지만 영지 내 백성들을 생각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모습이나, 딸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모습이 나오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어 이후 모가미 요시아키를 재평가하는 사람도 많아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